해미순교성지, 교황이 찾은 곳에서 순교자 1천 명의 흔적을 만나다

2026-09-01 · 여행 · 읽는데 7분

해미순교성지, 교황이 찾은 곳에서 순교자 1천 명의 흔적을 만나다

해미순교성지, 가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들

해미순교성지는 1866년부터 1872년까지 이어진 병인박해 시기에 충청도와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 약 1,000명 이상이 처형되거나 생매장당한 곳입니다. 이곳은 다른 순교지보다도 당시 박해의 참혹한 흔적을 생생하게 간직한 곳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방문하면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성지 곳곳에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는 공간과 함께 당시 처형 도구 등 역사적 유물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해미순교성지의 역사적 배경, 왜 이곳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을까

해미는 조선 초기 충청 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1651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뒤에는 현으로 축소되었지만, 여전히 1,400~1,50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는 진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해미 현감은 충청좌도 내포 지방의 해안 수비 명목으로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그 담당 지역은 충청도는 물론 경기도 평택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고문과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면서 박해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특히 1868년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이후에는 박해의 강도가 더욱 거세졌습니다. 병인양요 이후에는 먼저 처형한 뒤 조정에 보고하는 선참후계령이 내려지면서, 해미진영은 천주교 신자들을 독단적으로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처형을 집행한 관리들은 보고를 누락하거나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경우가 많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미천변 여숫골, 생매장이 자행된 현장

해미읍성 서문 밖과 해미천변은 순교자들의 주요 처형 장소였습니다. 초기에는 교수형, 참수형, 몰매질형, 석형 등의 방식으로 한 명씩 처형하다가, 인원이 많아지자 생매장을 시작했습니다. 해미진영 서녘 들판에 큰 구덩이를 파고 산 사람들을 밀어넣어 흙과 자갈로 묻어버린 것입니다. 여름철에 죄인의 수가 적을 경우에는 개울 한가운데 둠벙에 죄인들을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도 자행되었습니다.

해미천변에서 순교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소리가, 지역 주민들에게는 "여수(여우의 방언)머리"로 들렸다고 합니다. 신자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주민들은 '저들은 여우에게 홀렸으니 저렇게 죽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외국어가 모국어의 특정 단어처럼 들리는 몬더그린 현상의 한 사례로 설명됩니다.

해미천변 여숫골, 생매장이 자행된 현장
해미천변 여숫골, 생매장이 자행된 현장
구분 내용
위치 충남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순교 규모 1,000명 이상 (해미천변 포함)
주요 박해 시기 1866년~1872년
유해 발굴 1935년 범바로 신부

한티고개와 해미읍성, 순교의 길을 따라서

해미순교성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가야산(678m)에 위치한 한티고개입니다. 내포 지방에서 집단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가 바로 이곳입니다. 신자들은 이 고개를 넘어 해미읍성으로 끌려왔고, 읍성 안의 큰 감옥 두 곳은 항상 천주교 신자들로 북적였다고 전해집니다. 감옥이 있던 장소에는 당시 순교자들이 손발과 머리채를 묶여 매달리던 호야나무 가지가 지금도 흔적을 간직한 채 서 있습니다.

해미읍성 서문 밖에는 순교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된 '자리갯돌'이 보존·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돌은 길이 4.2m, 폭 1.5m로, 죄수의 몸을 곡식단처럼 메어쳐 머리가 깨져 죽게 하는 자리개질에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철사줄로 신자들을 고목인 회화나무에 매달아 고문하거나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는 일도 있었으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댔다고 합니다.

성지 조성과 교황 방문, 오늘날의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932년 서산성당에 부임한 프랑스 출신 범바로 신부는 1935년부터 해미 순교지에 대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84세와 85세였던 이주필과 박승익은 1868년을 전후해 해미에서 자행된 처형 현장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유해 발굴에 나선 범바로 신부는 시신 수십여 구의 썩은 진토와 10여 구의 유해를 찾아냈고, 이를 30리 밖 상홍리공소에 임시 안장했습니다. 이후 1995년에 유해 발굴터인 이곳으로 다시 옮겨져 보존되고 있습니다.

1985년 4월 해미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었고, 같은 해 6월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가 발족되었습니다. 신자들을 대상으로 홍보와 모금 활동을 벌인 끝에 1998년 순교 성지 부지 약 2만 3,100㎡를 확보했고, 2003년 6월 17일 성지 건립을 완료했습니다. 2014년에는 로마 교황청이 해미 순교자 3명을 복자로 추대했으며, 같은 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해미순교성지를 직접 찾아 순례하고 아시아 주교단과 만났습니다.

성지 조성과 교황 방문, 오늘날의 해미순교성지
성지 조성과 교황 방문, 오늘날의 해미순교성지
항목 시기 비고
유해 발굴 1935년 범바로 신부 주도
성지 부지 확보 1998년 약 2만 3,100㎡
성지 건립 완료 2003년 6월 대성당 포함
복자 추대 2014년 해미 순교자 3명
교황 방문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순교자 현양과 기억, 해미순교성지의 오늘

해미순교성지는 단순한 역사 유적지가 아니라, 이름 모를 수천 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도의 공간입니다. 성지 대성당 아래에는 12개의 기둥이 있는데, 이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발굴된 유해는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안치되어 있으며, 많은 유해가 홍수로 유실된 점을 감안하면 현재 남아있는 유해는 그 일부에 불과합니다.

해미천변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의 연장 끝에 버려진 뼈들이 걸려 나온 일이 많았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렇게 캐어낸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생매장의 직접적인 증거로 여겨집니다. 순교자들의 유해가 이렇게 흩어졌음에도, 해미순교성지는 그들의 신앙을 기억하고 현양하는 중심지로서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해미순교성지 방문 시 확인하면 좋은 것들

해미순교성지를 방문할 때는 다음의 장소들을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 해미천변 여숫골: 생매장이 자행된 현장으로, 순교자들의 유해가 발굴된 곳
  • 해미읍성 서문 밖: 자리갯돌과 회화나무 등 처형 도구와 흔적이 보존된 곳
  • 한티고개: 체포된 신자들이 해미읍성으로 압송될 때 넘던 고개
  • 대성당: 2003년 완공된 성지의 중심 건물로, 순교자들을 기리는 공간

이 외에도 성지 곳곳에는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보여주는 여러 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방문 전에 해미순교성지의 역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본 정보를 미리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